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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의 날’을 맞으며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맞으며

 

 나민희 유튜브 크리에이터

 

 

지난 2024년 7월 14일, 대한민국 청와대에서는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공식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은 1997년 7월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지 정확히 27년 째 되는 날이었다. “자유를 향한 용기, 통일로 가는 여정”이라는 슬로건 아래,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 국회의원,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온 탈북민들이 함께 모여 의미를 나눴다. 긴장된 듯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단상에 선 사람들의 떨리는 말과 객석에 있는 참석자들의 상기된 표정에서 이 날이 얼마나 특별하고도 상징적인지 느낄 수 있었다.

 

[유튜브를 통한 이야기와 소통의 힘]

10년 전 한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내게 이런 날이 생기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 정착했을 당시에는 “그냥 조용히 살아야 해. 너무 드러나지 말자”는 생각뿐이었다.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침묵이 어쩌면 이기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가족은 여전히 북한에서 기본적인 자유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북한사회의 변화를 위해 애써줄 것인가.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겪은 이야기, 내가 살아낸 시간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가 아주 작은 울림이라도 되어, 언젠가 북한의 변화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송에 나서게 되었다. 지금은 ‘평양여자나민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나의 아픔과 경험을 솔직히 고백했을 뿐인데, 시청자들은 “그랬군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라며 진심 어린 공감을 보내주었고, 그 따뜻한 눈빛은 화면 너머로도 전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보이지 않던 경계를 조금씩 허물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한 건,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그로 인해 나 역시 조금씩 치유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이 지금도 여전히 신기하고, 또 참으로 감사하다.

 

[북한이탈주민을 기억하는 날이 생겨]

지금까지 3만 5천 명 가까운 탈북민이 한국에 정착했다. 전체 인구의 0.07%에 불과한 수치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와 상처, 희망과 용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 하루는 단순한 기념이 아닌, 우리 사회가 탈북민을 하나의 ‘시민’으로, ‘이웃’으로, 그리고 ‘동료 국민’으로 인정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단 하루일지라도, ‘우리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날이 생겼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울림을 준다.

올해 2025년에는 서울 코엑스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제2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기념식은 물론이고 문화공연, 체육대회, 북한음식 체험 부스까지 마련되어, 탈북민과 비탈북민이 함께 웃고 대화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따뜻한 메시지였다. 특히 탈북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함께한 대화 콘서트에서는,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솔직하게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벽을 허무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처음 보는 탈북민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말없이도 서로의 시간을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착의 길은 여전히 쉽지 않다. 억양, 말투, 표현방식 하나하나가 때로는 우리를 설명하게 만들고, 또 때로는 변명하게 만든다. 출신지를 묻는 무심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게 되고, 평범한 대화 속에서 북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예기치 못한 긴장이 스며든다. 고립감은 그런 틈에서 조용히 찾아온다. 그러니 이날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작지만 깊은 위로가 담긴 날이기도 하다. 나처럼 수없이 질문을 받고, 같은 설명을 반복해온 사람들에게는 그 하루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쉼표가 되어준다.

 

남북하나재단의 2023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의 79.3%가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탈북민들이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28.3%는 ‘가족과의 생이별’을 가장 큰 불만족 요인으로 꼽았다. 나 역시 그 마음을 안다. 어떤 날은 그저 밥을 먹으려 앉았다가도, 문득 고향 생각에 북받칠 때가 있다. 북한에서 자주 먹던 음식 재료라서, 혹은 북한에선 쉽게 접할 수 없던 귀한 음식이라서, 입안의 맛이 추억을 자극하고, 그리움이 깊어질 때가 있다.

이처럼 함께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마음 한켠은 여전히 외롭고 혼자인 탈북민들이 많다.

 

 

[탈북민, 이제는 도움을 주는 존재로]

현재 탈북민의 고용률은 60.1%, 실업률은 6.3% 수준이다.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수치지만, 여전히 문화 차이에서 비롯되는 어려움, 조직 내에서의 거리감, 낯선 사회적 분위기는 정착 과정에서 상당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북한에서의 경험을 비교적 자유롭게 나누고 있지만, 많은 탈북민들은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않은 채 매일 직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 일상은 또 다른 종류의 용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 정부의 지원도 보다 실질적인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다. 취업, 교육, 심리 상담 등 여러 분야에서 탈북민 맞춤형 서비스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정착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탈북민이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점차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 공무원, 사회복지사, 유튜버, 창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탈북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에는 의사, 변호사, 법무사 등 남한 출신들에게도 진입이 어려운 전문직 자격을 취득한 탈북민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성취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가 탈북민의 자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결과이며, 동시에 그 노력에 탈북민들이 스스로 응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날을 맞으며 내 안에 스며든 한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바로 ‘탈북민’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너무 강한 정체성으로 굳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다. 나는 단지 북한 출신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취향, 생각을 지닌 하나의 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탈북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곤 한다. 때로는 북한을 대표하는 듯한 위치에 놓이기도 하고, 나의 경험이 ‘탈북민 일반’의 이야기로 오해될 때면 부담스럽고 외롭다. 그래서 가끔은 그 단어를 조용히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다. 그냥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해석되는 것이다. ‘탈북민’이라는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나를 가두는 단어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면, 우리는 그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낙인이 아니라, 연대와 공감의 언어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이름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는 날을 향해]

‘북한이탈주민의 날’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날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의 용기와 삶을 기억하는 날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기억은 개인의 것이면서도 공동체의 것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윤리적 지침을 제공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날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시간이다.

어쩌면 진정한 통합은 제도나 정치적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 이름 너머의 인간을 바라보려는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하루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남북 간 갈등과 긴장이 여전히 이어지는 시대이기에, 이 날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만약 이 하루만큼이라도, 탈북민이 ‘탈북민’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남과 북의 사람들이 ‘출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마주 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날은 충분히 존재할 이유가 있다.

언젠가는 이 날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탈북민’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날, 남과 북이라는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날, 언젠가 평화롭게 하나 된 한반도에서 “그런 날도 있었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꿈꾼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날은 계속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북한이탈주민의 날’이 단지 특정 집단의 날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남과 북의 분단은 지리적인 선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선이기도 하다. 그 선을 지우는 힘은 제도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공감, 그리고 연대가 진짜 통일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미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눈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날’이 그러한 공동의 서사를 회복하는 날이 되기를, 그래서 언젠가 이 날이 ‘추억’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서로를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해하며, 조금씩 하나가 되어가야 한다. 평화는 그렇게,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