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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기획 시리즈 3.

세 번째 이야기 : 이승만은 과연 친미 사대주의자였는가?

이승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친미 사대주의’로 인해 대미 관계가 외교적 상도(常道)를 벗어나 맹목적·종속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비난한다. 한편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친미(親美)가 아니면 북한처럼 친소(親蘇)를 했어야 했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단순한 친미(親美)가 아니라 용미(用美)였으며,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에 당당히 맞섰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라진 양측 주장에 대해 ① 건국 당시 이승만의 친미 정책은 잘못된 것인가?와 ② 이승만은 과연 ‘친미 사대주의자’인가, 아니면 ‘용미 실용주의자’인가?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건국 당시 이승만의 ‘친미’ 정책은 잘못된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로 불릴 정도로 인류와 전쟁은 뗄라야 뗄 수없는 관계이다. 어떤 역사가(歷史家)는 전쟁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 투쟁의 일부이기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국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에 대비하였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법 중 하나가 동맹의 선택이었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을 치를 정도로 앙숙이었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선택했고, 최근에는 오랜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핀란드와 스웨덴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자극받아 나토(NATO)가입을 추진한 바 있다. 특히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핀란드는 비굴하게 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유지하는 외교 행태로 ‘핀란드 화’라는 조롱을 받아왔는데 그 핀란드마저 나토동맹이라는 새로운 선택을 하였다. 동맹의 역사는 유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배신과 동맹을 반복하는 장면들을 삼국지 등에서 목격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안보를 위한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 여겨왔다.

 

동맹의 교훈은 한반도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동맹’의 관점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는다면 그중 하나가 구한말 조선이 행한 외교 행태일 것이다. 당시 청나라·러시아(소련)·일본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강대국 영국이 ‘역외균형자(域外均衡子, offshore balancer)’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며 동북아시아의 상황에 개입함으로써 러시아와 영국의 패권 다툼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륙진출을 모색하던 일본의 선택은 영국이었고,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국이 되어 한반도 상황에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반면 외교와 안보에 무지했던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을 뿐 아니라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압력을 피해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시행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외교 행보를 취함으로써 동맹 선택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50여 년 후, 역사는 되풀이되어 청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그 이름만 바뀐 채 한반도의 안보를 위협하였으며, 역외균형자의 역할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채 한반도에는 또다시 생존을 위한 동맹의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이 도래되었다. 당시 38도선 이북과 이남에는 소련과 미국이 각각 점령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냉전의 세계에서 선택지는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38선 이북의 김일성 정권의 동맹 파트너는 공산주의의 맹주 소련이었던 반면 38선 이남의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의 기원을 제공한 미국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 한쪽은 인권탄압과 가난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풍요와 자유가 넘쳐나고 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내 자식이 좋은 친구를 만나 서로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를 바란다. 만약 같은 반에 공산주의자인 ‘소련’이라는 친구와 자유민주주의자인 ‘미국’이라는 친구 중 택일을 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당연히 ‘미국’이라는 친구를 추천하지 않겠는가? 선택 당시에는 ‘소련’이라는 아이가 어떤 성향의 친구인지 몰랐더라면 훗날 그 친구의 진면목을 알고는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고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상의 도리가 이럴진대 이승만이 친구(동맹)로 미국을 선택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소련의 잔악상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소련을 친구로 선택하여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을 옹호하고 있으니 그들이 말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② 이승만은 과연 ‘친미 사대주의자’인가, 아니면 ‘용미 실용주의자’인가?

 

사전적으로 사대주의란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라고 정의하듯이 이승만을 ‘친미 사대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사람들은 마치 이승만이 강대국 미국을 섬기고 그 대가로 미국의 후원에 의해 권력을 잡고 미국이 요구대로 행동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미국에서 각종 학위를 수여 받았고 오랜 기간 미국 생활을 하였지만 결코 미국의 정책에 순응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동맹과 전략적 파트너로 여겼지만 이승만과 미국의 정책 담당자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 관계의 연속이었으며, 이는 건국 과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전 종결을 위한 휴전 협상 때에도 지속되었다. 이런 미국과의 대립은 어쩌면 당시 정세에 대한 이승만과 미국 정책 담당자들의 생각의 차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승만은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자주권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고 여겼지만 미국은 일본의 패망 후 한국은 당연히 강대국에 의해 일정 기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일관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이승만은 결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3대 강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면서 적당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해방하고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강대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노골화함으로써 이승만과 미국과의 갈등은 불가피하였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과 불만은 미국 친구인 로버트 T. 올리버 박사(미국대학 교수, 개인비서로 이승만을 도움)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 사람들은 1905년 일본의 굴레에 자신들을 넘겨준 미국 정치가의 배신(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분개하고 있소. 만약 미국 정치가가 한국인들에게 또 다른 강대국의 굴레를 씌우려 한다면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아무리 나쁜 감정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 <이승만의 대미투쟁> (42쪽) -

 

이승만과 미국 정책 담당자와의 두 번째 엇박자는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와 대응’이였다. 훗날 냉전이 고착화된 후 대 소련 봉쇄정책이 시행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으로 치닫고 있을 즈음에는 미국에서 조차도 공산당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자국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대일본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자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을 요구하였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 내에서는 스탈린 띄우기에 열을 올리는 등 공산주의 열풍이 일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열풍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등 유럽에서도 붐을 일으켰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들과의 동행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얼마나 이승만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는지는 공산주의자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는 미국을 향한 이승만의 1954년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공산주의를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시오.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퇴치 투쟁에 나서야만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주장이 강경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세력입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위해 궐기합시다.” - 1954년 7월 28일 -

 

이승만과 미국과의 세 번째 의견 충돌은 한반도 안보에 대한 미국과의 입장차이였으며, 특히 이승만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미국의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미국이 자원이나 시장 면에서 한반도가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대 한반도 안보정책에 의구심을 갖게된 결정적 배경에는, 1905년 일본과 미국이 각각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한 점,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이 우려되는 시점인 동년 6월에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긴 채 미군을 남한에서 철수시켰으며,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부 장관 에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등의 조치 등으로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제공한 점등을 들어 대한민국 방위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약속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휴전 협정 과정에서도 조기 휴전을 희망하는 미국과 이 기회에 기필코 북진통일을 달성하겠다는 양측의 의견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급기야 1953년 5월 유엔군사령부는 일명 에버-레디(Ever–ready)작전으로 대통령을 감금하고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려는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미국 정부의 불허로 미수(?)에 그쳤지만 이승만의 대미투쟁의 실체를 보여주는 극단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안보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없이 한국전쟁의 조기 휴전 추진이 지속되자 1953년 6월 이승만은 전 세계가 경악한 반공포로 석방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되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의 재남침에 대한 우려를 씻어내고 국가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소련이 아닌 미국을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 것을 친미(親美)라고 비난한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도 있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혼돈의 시기,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서방세계가 공산주의자와의 동거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소신을 기반으로 미국을 동맹으로 선택함으로써 동맹의 파트너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씨앗을 뿌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과 북의 동맹 선택의 결과가 너무도 극명해서 그런지 이승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친미’라는 비난을 넘어 ‘친미 사대주의자’로 매도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추구한 자주외교는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붕괴를 고려할 정도로 첨예하게 부딪쳤다. 위기의 순간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벼랑끝전술로 미국과 대립한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켰으며, 주한미군의 한국 상주(常主)로 국방을 강화하고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의 원조를 확보함으로써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야말로 사대주의가 아닌 철저한 ‘용미 실용주의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종명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