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가자지구의 평화정착, 앞으로 더욱 험난…트럼프의 평화구상, ‘솔로몬의 해법’은 아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가자지구의 현실 ‘약속의 땅에서 전쟁의 상징으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구약성서 민수기 13장에 언급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일부다. 가나안은 지중해 남동쪽 연안 지역으로 좁게는 현재의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넓게는 골란고원과 레바논, 시나이반도까지를 말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은 크게 가자지구와 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으로 구성됐다. 가자지구의 면적은 360㎢로 우리나라의 세종시보다 조금 넓다. 길이는 40㎞, 평균 너비는 8㎞로 남북으로 길쭉하게 뻗은 직사각형 모양이다. 가자지구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됐다가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현재의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이 됐다.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인 가자지구의 동쪽과 북쪽은 이스라엘이 설치한 분리장벽에 가로막혀 있고 남쪽은 이집트의 국경과 접하고 있다. 서쪽은 지중해와 면하고 있다. 사실상 사방이 모두 막혀 있어 가자지구 주민들은 영토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때문에 가자지구는 ‘세계 최대의 지붕 없는 감옥’으로 불려왔다. 팔레스타인 무정정파인 하마스는 2006년 자치정부 총선에서 PLO의 핵심세력이자 집권 여당인 파타당을 패배시키면서 사실상 가자지구를 통치해왔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해왔다.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고 테러 등 무장투쟁을 감행해왔기 때문이다. 가자지구는 지난 2년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전쟁’으로 ‘피와 눈물이 흐르는 지옥’으로 변했다. 하마스가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당시 하마스의 기습작전으로 주민 1200여 명이 살해되고 251명이 납치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은 전투기 등을 동원해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벌였고, 대규모 지상군까지 투입해 하마스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의 일방적 공세로 하마스는 궤멸 수준에 이르렀으며, 가자지구는 초토화됐다. 하마스 수장이었던 이스마일 하니예는 지난해 7월 이란 방문 도중 이스라엘의 표적 공습에 암살당했고, 이스라엘 기습 작전을 주도했던 야히야 신와르가 하니예의 뒤를 이었지만 같은 해 10월 가자지구에서 사살됐다. 가자지구의 75%를 통제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9월에는 가자지구 사실상 수도이자 북부 중심지인 가자시티 완전장악을 위한 지상 작전에 돌입하는 등 총공세를 감행했다. 가자전쟁 2년째인 10월 7일 기준으로 가자지구 보건부가 발표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6만7160명이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사망자의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라고 밝혔다. 사망자 수에는 잔해 속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 명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인다. 가자지구 전체 주택의 92%인 43만6000채가 파괴되거나 손상됐다. 또 모든 상업 시설의 80%와 도로망의 68%가 파괴되거나 훼손됐다. 가자지구 주민들 220만여 명 중 90%가 집을 잃은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가자지구 사망자들 중 민간인 비율이 83%에 달한다면서 1989년부터 벌어진 각국의 전쟁과 분쟁들에 비해 민간인 피해율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사망자들 중 민간인 비율은 1992∼1995년 보스니아 전쟁에서 57%, 시리아 내전에서 29∼34%, 2022∼2024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10∼21%,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8∼12% 수준이었다. 전쟁 종식의 첫걸음, 트럼프의 ‘가자 평화구상’ 그런데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10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가자지구 평화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9월 28일 가자지구 평화구상 20개 항목을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제시하고 이에 합의할 것을 압박했다. 그 내용을 보면 1단계는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격 중단과 단계적 철수, 하마스의 이스라엘 생존 인질 석방과 사망한 인질의 시신 송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석방 등이다. 2단계는 △하마스 무장 해제와 이스라엘 완전 철군, 하마스 지도부 사면, 휴전을 감독할 국제 안정화군 창설 등이다. 3단계는 △아랍과 국제 기금을 통한 가자지구 재건, 팔레스타인 기술 관료로 구성된 임시 과도 위원회의 가자지구 운영, 트럼프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 국제 평화 위원회 설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개혁,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가능성 검토 등이다. 하마스는 1단계 합의에 따라 10월 13일 억류했던 이스라엘 생존 인질 20명을 모두 석방했다. 이들이 풀려난 것은 737일 만이었다. 하마스는 사망한 인질 28명의 시신 일부도 이스라엘에 인도했지만 완료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이들의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종신형을 받은 250명을 포함해 팔레스타인 수감자 1966명을 석방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의 1단계 철수선까지 병력을 후퇴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3일 이스라엘을 방문해 의회 연설을 통해 “지금부터 몇 세대에 걸쳐 이 순간이 전쟁의 끝일뿐만 아니라 모든 변화의 시작점으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새로운 중동의 역사적 새벽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공동으로 이집트 홍해 휴양도시인 샤름 엘 셰이크에서 가자지구 평화를 위한 정상회의를 주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엘 시시 대통령,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에 대통령 등 휴전 중재국 정상들과 함께 ‘가자평화선언’에 서명했다. 이 회의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20여 개 주요국 정상들은 물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등 34명의 각국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평화구상을 적극 추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오판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9월 9일 미국에 사전 통보도 없이 하마스 지도부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카타르 수도 도하 소재 하마스 건물을 탄도 미사일로 공격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도부가 회의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공격했지만, 하마스 지도부는 아무도 없었다. 카타르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주요 비(非)나토 동맹(MNNA) 19개국 중 하나다. 카타르는 중동 최대의 공군기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미국과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미국은 우방인 카타르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자 자칫하면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카타르 공격을 미국이 승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도하 공습을 감행해 중동 지역의 위기를 고조시킨 데 대해 크게 분노했지만, 가자 전쟁 종식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특사에게 기존에 제안한 휴전안과 가자지구 재건계획을 결합해 새로운 평화 구상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총회 직전 뉴욕에서 카타르 등 8개 이슬람 국가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평화 구상을 설명했고, 이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구상에 반대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다섯 차례나 전화 통화로 압력을 가했다. 결국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구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갈수록 피해가 가중돼왔던 하마스도 이에 동의했다. 물론 노벨평화상을 노린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인 야심도 한 몫 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화의 길, 그 해법과 한계 그렇다면 앞으로 가자지구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국제사회에선 벌써부터 회의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이 깨지기 쉬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평화구상의 2단계 핵심인 하마스의 무장해제는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하마스의 무장해제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이는 가자지구 평화구상 2단계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하마스는 그동안 이스라엘의 점령이 완전히 끝나고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되지 않는 한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마스는 가자지구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리로 넘어가야 하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국가가 되면 그때 무장해제에 나서겠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먼저 무장해제를 하지 않으면 휴전 자체를 무효화하고 가자지구에 대한 군사작전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두 국가(Two-State Solution)’ 해법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 서방 국가들과 아랍 국가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도 가자지구의 평화정착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슬로 평화 협정에 따라 각자 독립된 국가를 세워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것을 말한다. 현재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에서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등 145개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에 반대하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와 이스라엘 정치권의 강경파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창설에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구약성서에 약속의 땅이라고 언급된 가자지구를 자국 영토라고 보고 있다. 미국은 과거에는 ‘두 국가’ 해법에 긍정적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며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할 경우 사우디 등 중동과 이슬람 국가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반면 미국이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할 경우 오랜 동맹국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계선을 확정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구상이 앞으로 가자지구의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솔로몬의 해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