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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으로 본 국가생존 전략

싸우고 협상하며 거란 침략군 완전 격퇴
和戰양면 전략으로 ‘작지만 강한’ 모습 보여줘
거란에 머리 숙이면서도 상당한 자율성 지켜

 

 

“4월 거란에서 어사대부 상장군 소회례 등이 와서 왕을 개부의동삼사 수상 서령 상주국 고려국왕에 책봉하고 식읍 1만호와 식실봉 1천호 … 를 하사하였 다. 이때부터 다시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려사》 권4, 〈세가〉 권제 4)

 

서기 1022년 4월 고려 개경 왕궁에서는 동북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변곡점을 상징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것은 고려는 송나라 대신에 거란을 상국으로 섬긴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재확인하고 거란은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년)을 ‘고려국왕’으로 공식 인정하는 자리였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시 고려로서는 오랜 진통 끝에 압록강변 강동 6주를 얻고 고려-거란-송 3국 간의 세력균형을 이끌어낸, 그야말로 피어린 외교적 성과였다. 이 같은 대전환의 밑바탕에는 요즘 TV 드라마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고려․거란전쟁이 있었다.

고려(918~1392년)와 거란(916~1125년)의 관계는 개국 직후 거란[947년 국호를 ‘요’로 개칭했으나 본고에서는 거란으로 표기]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가 대광현(大光顯․발해 세자) 등 발해 유민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처음부터 충돌을 예고했다. 고려 태조가 거란 사신들을 유배 보내고 이들이 가져온 낙타 50필을 굶겨 죽인 이후 고려의 북진정책과 거란의 요동 지역 여진족 토벌이 맞부딪쳐 두 나라 사이에는 불안정성이 증폭돼갔다.

실제로 고려는 거란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며 송나라와의 사대관계에 몰두했고, 거란은 거란대로 중원제국 송과의 전쟁에 앞서 배후의 고려를 어떤 식으로든 ‘손보겠다’는 집착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전운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고려 성종(재위 981∼997년) 때인 993년 10월 거란 동경유수 소항덕(蕭恒德․‘손녕’은 자이지만 본고에서는 기존 소손녕으로 표기)이 이끄는 호왈 8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전광석화처럼 봉산군[평북 구성?]을 함락시키니 제1차 고려․거란전쟁의 발발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 안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목소리를 높여 일단 성종도 동조했으나 내사시랑 서희(徐熙)의 강력한 반발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거란군이 청천강 남쪽 안융진[평남 문덕]에서 고려군에 참패하고 강화를 제안해옴으로써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는데 아마도 소손녕은 더 이상 깊숙이 진군했다가는 자칫 퇴로가 막힐 수 있다는 점 등을 우려했던 것 같다.

 

서희, 거란의 속내 꿰뚫고 담판… ‘강동 6주’ 확보

 

결국 성종이 서희를 거란 군영에 급파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외교전략가 서희가 등장한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음에도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음과 ▲가까운 거란이 아닌 바다 건너 송나라와 섬기고 있음을 문제 삼으며 ‘영토 할양과 조빙(朝聘: 입조와 교빙을 합친 말로 제후국의 왕 또는 신하가 황제를 알현하거나 황제국과 제후국의 신하가 왕래함)’을 요구했다.

서희는 순간 저들의 내침 의도를 꿰뚫어 보고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我國卽高勾麗之舊也)”이라며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고려사》 권94, 〈열전〉7, ‘제신’)라고 단번에 일축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 지역(且鴨綠江內外 亦我境內)”이라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둑질하여 차지하고 …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여진 때문에 조빙을 못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덧붙여 자신의 말을 거란 황제에게 전해달라고 읍소하는 등 외교적 수사 또한 잊지 않았다.

서희와 소손녕 간의 밀고 당긴 협상 결과 거란군은 철수하게 됐고, 고려는 여진족 거주 ‘안북부[평남 안주]에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280리(從安北府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3년)’의 접경 지역을 확보하는 한편 송과의 국교 단절과 거란 연호 사용과 입조를 약속했다.

서희의 지혜와 담력이 일궈낸 값진 외교적 성과였다. 물론 고려가 압록강 너머로 북진하는 것을 막고 송과 연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저들의 전략적 속셈이 일정 부분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고려는 싸우지 않고 부전승을 거둔 셈이었고, 이렇게 얻어낸 땅에 흥화진․용주․철주․통주․곽주․귀주 등 여섯 개 요충지가 건설됐으니 바로 ‘강동 6주’다.

그 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겉으로는 평화가 유지됐음에도 거란이 압록강 지역에서 군사적 행동을 빈번히 하고 고려가 송과 비공식 관계를 계속 이어감에 따라 불씨는 여전했다.

1004년 거란이 ‘전연의 맹(澶淵之盟: 거란 성종과 송 진종이 맺은 불평등 화약으로 매년 송이 거란에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바치도록 함)’을 통해 중원제국 송나라를 무릎 꿇리고 다시금 동방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할 즈음 고려에서는 ‘강조의 변’으로 불리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1009년 1월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가 개경으로 군사들을 몰고 가 목종을 제거하고 대량원군 왕순(王詢․현종)을 즉위시켜 정권을 장악했는데 거란 성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듬해 11월 직접 소배압(蕭排押․소손녕의 형)을 도통으로 하는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 침공에 나선다.

강조의 ‘시군지죄(弑君之罪)를 묻는다는’는 것은 한낱 명분이었을 뿐 고려와 송의 교류를 완전히 막고 동북면 안팎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을 꺾으려는 게 본심이었다. 아울러 과거 소손녕이 서희와의 담판에서 내주었던 강동 6주를 되찾는 것 또한 중요했다.

 

거란 황제 친정에 맞서 절묘한 외교술로 국난 극복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평북 의주]을 공격했지만 서북면도순검사 양규(楊規) 등의 철통같은 방비를 뚫지 못한 채 통주성[평북 동림]을 공격해 고려군을 무너뜨리고 행영도통사로 나와 있던 강조를 사로잡았다. 그는 거란 성종의 회유를 뿌리치고 장렬히 최후를 맞는다.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개경까지 점령했다. 이에 현종은 황망히 도성을 떠나 광주, 공주, 완주 등을 거쳐 나주까지 몽진하면서 유배 중이던 하공진(河拱辰)을 거란 측에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사실 거란군은 흥화진, 서경 등 주요 거점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내려와 배후가 걱정됐고 병참선 또한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개경에 마냥 머무를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거란은 1011년 1월 고려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여 국왕이 친조(親朝: 제후국 군주가 직접 천자국 황제를 배알함)한다는 조건으로 개경을 불태우고 서둘러 군사를 돌린다. 하지만 고려군은 거란군을 그대로 보내지 않고 곽주[평북 곽산], 귀주[〃 구성] 등에서 마지막 반격을 가해 압록강을 넘어가기까지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거란으로서는 씁쓸한 황제 친정이었다.

제2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거란의 철군을 맞바꾸며 끝났고, 고려는 이 과정에서 북방 3각관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화전 양면의 국가전략을 터득하게 된다.

거란은 2차 침략이 실패한 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강요하며 고려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여기에 고려는 정면으로 대응해 국왕의 건강 등을 핑계로 계속 친조를 회피하고 강동 6주에 대해선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송과의 교류를 재개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천리장성 축조에 박차를 가했다.

급기야 1018년 12월 동평군왕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이 고려를 재침함으로써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불붙게 된다. 그러자 고려는 문관 출신의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8천 명의 출정군을 꾸려 전선으로 보냈다. 적어도 병력 규모로 보아 과거 1․2차 때와는 달리 군사적으로 충분한 대응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고려군 기병의 매복작전에 걸려 초전부터 큰 피해를 입고 무리하게 개경으로 향했지만 성 밖의 모든 것을 불태운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과 고려군의 분전에 밀려 패퇴했다. 그러나 더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를 넘긴 1019년 2월 거란군은 압록강을 눈앞에 둔 귀주에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결전을 벌여 완전히 궤멸되었다. 저 유명한 ‘귀주대첩’으로 《고려사절요》는“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生還者 僅數千人 契丹之敗 未有如此之甚)”라고 적고 있다.

 

‘귀주대첩’ 등 통해 거란군 축출… 고려-거란-송 세력균형 이끌어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노련한 외교적 제스처를 구사한다. 요즘 식으로 말해 표정 관리라고 할까!

1020년 2월, 그러니까 거란군이 참혹하게 쫓겨난 지 1년 만에 고려 현종은 거란에 스스로를 ‘번국(藩國: 제후국)’이라 칭하며 표문(表文: 제후국 군주가 황제에게 보내는 공한)을 올려 화친을 청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022년 4월 거란 성종은 강동 6주를 포기하고 사신을 보내 고려 현종을 ‘고려국왕’에 봉했으니 현종이 즉위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상화된다.

국제관계가 아무리 힘의 정치(Power Politics)의 산물이긴 해도 무력만으로 국가를 수호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대제국인 거란과 송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처절히 싸우며 절묘한 외교전략과 심리전으로 맞서 외적을 격퇴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 조공-책봉관계 속에서도 상당한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한 대사는 우리에게 진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전쟁은 협상만으로는 종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전투에서 승리해야 끝나 는 겁니다.” (서희를 떠올리는 강감찬의 말 - ‘고려거란전쟁’ 23회)

 

김광백 그랜드코리아시민운동 대표